
스키 마니아였던 항공 엔지니어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워드 헤드(Howard Head). 어느 겨울 처음 스키를 타러 갔다가 온종일 넘어지기만 했던 그는, 마치 코트 위에서 저의 모습처럼 장비 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겁고, 잘 휘고, 조금만 젖으면 뒤틀렸던 목재 스키는 엔지니어의 눈에 잘못 만들어진 물건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워드 헤드는 직장을 그만두고, 포커판에서 딴 6,000달러와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모아 헤드 스키 컴퍼니(Head Ski Company)를 창업합니다. 비행기 날개를 만들던 기술을 스키에 이식해 시장을 장악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테니스 라켓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금속 라켓의 시작은 HEAD가 아닙니다. 1967년, 윌슨(Wilson)이 먼저였습니다. 프랑스 테니스 레전드 르네 라코스트(René Lacoste)가 1953년에 설계하고 특허를 낸 스틸 라켓 디자인을 윌슨이 사들여 T2000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고,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이 이 라켓으로 그랜드슬램을 제패하면서 금속 라켓 시대의 문이 열렸습니다. 목재가 전부였던 코트에 스틸이 등장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워드 헤드는 이 흐름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스틸은 강하지만 무겁습니다. 진동이 크고, 가공하기 어렵고, 대량 생산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키에서 써먹었던 알루미늄 소재를 떠올렸습니다. 비행기 날개에 쓰이는 알루미늄은 스틸보다 가볍고, 샌드위치 공법으로 가공하면 충분한 강성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69년 HEAD가 US 오픈에서 선보인 알루미늄 라켓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금속 라켓을 처음 만든 건 윌슨이었지만, 금속 라켓이 코트의 표준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HEAD의 알루미늄이었습니다. 둘의 접근 방식 차이가, 이후 라켓 소재의 역사를 가르는 분기점이 됐습니다.

새로운 라켓이 나왔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그걸 들고 휘몰아치기 전 까지는요. 1975년 윔블던 결승, 코트 양쪽에 선 두 선수의 대비는 선명했습니다. 지미 코너스(Jimmy Connors)는 세계 랭킹 1위에 전년도 윔블던 챔피언, 그리고 윌슨 T2000을 쥐고 있었습니다. 맞은편의 아서 애시(Arthur Ashe)는 HEAD 아서 애시 컴피티션을 들었습니다. 결과는 6-1, 6-1, 5-7, 6-4. 애시의 완승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습니다. 신소재 라켓이 프로 무대에서 실제로 더 강하다는 것을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서 애시는 단순한 홍보 모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HEAD의 개발팀과 직접 소통하며 라켓의 무게 배분과 프레임 설계에 의견을 냈고, 선수의 언어를 엔지니어의 도면으로 번역하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프로 선수를 공동 개발자로 대우하는 HEAD의 방식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1993년, HEAD는 당시 테니스계의 이단아였던 안드레 애가시(Andre Agassi)와 손을 잡고 새 시리즈를 선보였습니다. 이름은 래디컬(Radical). 검은색과 노란색이 교차하는 강렬한 배색은 코트 위에서도 단번에 눈에 띄었고, 사람들은 곧 이 라켓을 범블비(Bumblebee, 호박벌)라고 불렀습니다.

애가시의 반항적인 이미지와 라켓의 생김새가 하나의 아이콘을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애가시는 이미지가 완전히 바뀐 이후에도 — 머리를 밀고, 진지한 챔피언이 된 이후에도 — 은퇴할 때까지 래디컬 프레임을 신뢰했습니다. 라켓이 퍼포먼스로도 증명된 것입니다.
| 주요 선수 | 활동 시기 | 주요 성과 |
|---|---|---|
| 안드레 애가시 | 1993 – 2006 | 그랜드슬램 8회,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
| 앤디 머레이 | 2005 – 2019 | 그랜드슬램 3회, 올림픽 2관왕 |
| 테일러 프리츠 | 2019 – 현재 | US 오픈 2024 준우승 |
래디컬은 이후 앤디 머레이, 테일러 프리츠로 계보가 이어지며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라켓"이라는 포지션을 굳혔습니다. HEAD가 이 방식을 브랜드의 공식으로 만든 것도 래디컬의 성공 이후입니다. 선수의 이름과 성격을 라켓 시리즈에 녹이는 사일로(Silo) 시스템 — 조코비치의 스피드, 츠베레프의 그래비티, 코코 고프의 붐 — 은 모두 범블비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2013년, HEAD는 그래핀(Graphene)을 테니스 라켓에 최초로 적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또 신소재 마케팅이겠지"와 "이번엔 진짜다"가 뒤섞였습니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가 육각형 벌집 구조로 배열된 단층 소재입니다. 강철보다 200배 강하고, 2004년 발견되어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그 소재입니다.

여기까지는 마케팅 문구에서도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HEAD가 진짜로 주목한 건 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 소재가 가볍기 때문에, 남은 무게를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라켓의 목(shaft) 부분에 그래핀을 사용해 그 부위의 무게를 줄이고, 아낀 무게를 헤드 상단과 그립 끝으로 분산시켰습니다. 라켓을 가볍게 만든 게 아니라 무게를 이동시켜 타구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었던 혁명이었습니다.
스키장에서 넘어진 날부터, 오늘 켄넬바흐(Kennelbach) 공장에서 조코비치의 라켓이 1그램 단위로 조정되는 지금까지 — HEAD가 던져온 질문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장비가 사람의 한계를 어디까지 밀어줄 수 있을까?" 항공 엔지니어의 언어로 시작된 이 질문은, 알루미늄 라켓이 되고, 범블비가 되고, 그래핀이 되고, 오세틱이 됐습니다. 윌슨이 테니스의 역사를 쓰고 바볼랏이 테니스의 열정을 말한다면, HEAD는 테니스의 공학을 다룹니다. 그리고 그 공학의 뿌리는 여전히 같은 곳에 있습니다. 포커판 돈 6,000달러를 들고 창업한, 스키장에서 넘어진 엔지니어의 집착.
참고할만한 문서 : HEAD Brandography (Tennis Warehouse)

About Babolat Tennis
1875년 세계 최초의 테니스 스트링을 만든 바볼랏. 라켓 없이 120년을 버텨온 이 브랜드가 나달의 22번 그랜드슬램과 함께한 이야기, 지금 확인해보세요.

1875년 세계 최초의 테니스 스트링을 만든 바볼랏. 라켓 없이 120년을 버텨온 이 브랜드가 나달의 22번 그랜드슬램과 함께한 이야기, 지금 확인해보세요.

오늘 코트에서 잡은 라켓에는 100년이 넘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도축장 부산물에서 출발해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라켓까지 — 윌슨(Wilson)이 100년 넘게 테니스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이유를 알아봅니다. 프로 스태프, Clash,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

"테니스 장비 선택, 이제 감이 아닌 데이터로 결정하세요. tennisgear.app이 제공하는 라켓의 스윙웨이트, 강성부터 스트링의 에너지 리턴 수치까지—복잡한 숫자들이 플레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문가의 시선으로 완벽 해설해 드립니다. 나만의 '인생 라켓'을 찾는 과학적인 가이드를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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